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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1.30 나와 구두의 관계 / 안도현님
나와 구두의 관계 / 안도현님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면 적어도 4, 5년은 신고 다닌다. 
나한테 한 번 걸린 구두는 참으로 고생이 많다. 
구두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처절하게 끌려 다녀야 한다. 
굽이 닳으면 수선 가게에 가서 갈아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자주 구두약을 발라 윤이 나게 닦아주는 것도 아니다.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라면 
죽자살자 신발로서 그저 묵묵히 고된 노역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구두한테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것은 
나의 검소한 생활 따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구두를 애지중지 아껴가면서 신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내 구두는 늘 꾀죄죄하고 우중충하고 우글쭈글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구두는 미리 몸을 망칠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하고 쉽게 친해질 수가 없다.

구두 가게의 진열대 위에 놓여 있을 때 
구두의 광은 왜 그렇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번쩍거리는가? 
길들지 않은 새 구두는 얼마나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한가? 

새 구두를 한 켤레 장만했다고 치자. 
나는 구두를 사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뻣뻣한 구두 뒤축을 발바닥으로 지근지근 눌러 밟는다. 
구두 주걱을 이용해서 억지로 끼어 신지 않아도 될 만큼 
새 구두의 성깔이 누그러질 때까지 말이다. 
그 다음에는 약을 묻혀 구두를 솔로 닦는다. 
광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번쩍거리는 광을 죽이기 위해서다. 
마치 오래 전부터 길 위를 걸어다닌 구두처럼 얼렁뚱땅 위장을 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

누구나 한 번쯤 구두를 사서 구두한테 당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새 구두가 버릇도 없이 새 주인의 발뒤꿈치를 함부로 물어뜯던 기억 말이다. 
그러면 물집이 생겨도 아픈 기색 없이 신고 다녀야 한다. 
물집이 터져 아문 뒤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새 구두를 신었을 때,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구두를 길들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가만히 따져보자. 사람이 구두를 길들이는 게 아니다. 
구두가 사람을, 사람의 발을 길들이는 것이다. 

발과 구두가 불편하게 지내다가 
그 어색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시기는 아주 모호하다. 
그것은 슬며시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슬며시 스며드는 것>, 
그것을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한 번은 음식점에 갔다가 구두를 바꿔 신은 적이 있었다. 
뒤엉킨 신발들 속에서 누군가 내 구두를 먼저 꿰어 신고 자리를 떠버린 것이었다. 
분명히 내 구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 '누군가'의 구두만이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억울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 못된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신발 하나 못 찾아 신는 놈, 어디 나타나기만 해 봐라, 하고 나는 마구 툴툴거렸다. 

하지만 점잖은 체면에 맨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낯선 구두를 신어 보았다. 
디자인과 크기는 내 구두와 엇비슷했지만, 
낯선 구두를 신었을 때의 어색함이 내 발을 휘감아왔다. 
내 발은 낯선 구두에게 스며드는 것을 꺼렸고, 
낯선 구두도 내 발보다는 이전 주인의 발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 불화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내내 그 '누군가'를 원망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내 머리 속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바로 내 발과 낯선 구두가 나도 모르게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아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리라. 
서로에게 슬며시 스며드는 것, 스며들어서는 그이의 숨결이 되는 것!

구두가 내 몸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몸의 밑바닥인 발바닥보다 더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몸이 구두이다. 
발가락 사이의 질척한 땀과 고약한 고린내를 껴안고 
구두는 내가 걸어 다니는 길은 어디라도 따라 간다. 
아니, 나하고 함께 간다. 동고동락이다. 
내가 기쁘면 구두가 먼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껑충 뛰어오르고, 
내가 아파 누우면 구두가 미리 알아채고 현관에서 숨죽인 채 나를 기다린다. 

내가 늙어 가는 만큼 구두도 늙어 간다. 
그래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 늙어 가는 내 구두를 나는 미워할 수 없다. 
구두를 신고 길을 걸을 때, 왜 그가 따각따각거리는 소리를 내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걸어갈 길이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마음놓고 발걸음을 떼도 된다고 구두가 친절하게 안내하는 소리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나는 또 내 구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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