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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16 침묵으로 말하는 집 - 한영자님
침묵으로 말하는 집 - 한영자님

효창공원, 뜬금없이 서 있는 초가집.

내 방에 있는 작은 초가집은 늘 고요하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든 언어가 침잠해 있고 침묵이 너무 깊어 숨소리조차 녹아버린다.
이것은 몇 해전에 시집간 큰딸이 밤을 세워 만들었다.

지점토를 빚어 만든 초가집은 몸집이 큰 화장지 통 만하다.
찰흙에 조약돌을 이겨,울둑불둑 벽돌을 쌓아 짚을 엮어 덮은
반달형 초가지붕이 아담하다.
 
문득 코 끝에 맴도는 외갓집 뜰 흙내에 이끌리어
갈색 벽돌 중앙에 자리한 쌍미닫이문을 들여다본다.
이것은 정사각형 나무창살에 흰 창호지를 발라 달았다.
양 문고리를 자세히 보면 굵고 둥글다.

갈색 쇠고리 손잡이가 대롱거리는 채 문은 항상 배시시 열려져 있다.
더러 길손이 들면 문전 박대 않고 맞아들여 빈가라 끼니를 굶고있으면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대접해 보냈던 옛시절의 인심이
그 문전에서 소롯이 배여 나온다.
초가집 분위기는 늘상 지붕위에 어우러진 둥근 박이다.
 
죽 뻗어난 박넝쿨의 정기와 탐스런 박 잎 사이마다
하얀 박꽃을 피우고 있다.
각양각색 모양의 박들이 여물어 자라며
수줍은 얼굴 내민 모습이 소박해서 좋다.
문득 우리 옛 조상의 진한 순결성을 느낀다.

마음자태 바탕에 백의의 정기를 맥으로 이어온 민족이 아닌가.
오천년 역사 한겨레 핏줄의 상징이듯이 박넝쿨의 무한한 심성이 그러하다.
내심은 진취적이나 지리적인 탓에 역사적으로 숱한 외침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는 타국을 침범하지 않았다.
이는 약함보다 강한 군자의 덕으로 심지를 다져 꿋꿋이 참아낸
인내의 소침이 아닌가.
 
동방예의지국 백의민족성이 아마 청순한 박꽃을 닮았음인가.
고요한 달빛아래 핀 박꽃을 바라보며 마음이 둥글고
여유롭던 선조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비록 생활은 지금보다 가난했어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과 믿음이 풍요로웠다.

갓 말린 큰박, 작은 박, 조롱박을 어루만지며 웃어른과 아랫사람의 도리며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부모님의 지혜와 자애
그 자연스런 삶의 질서가 새삼 아쉽다.
처음에 나는 딸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서울로 시집을 가며 왜 이 초가집을 만들어
친정집 부산에 두고 갔는지 속속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딸이 출가한 후, 그 사이 세월은 계속 흘렀다.
그 애 없는 공간에서 봄, 겨울이 가고 해가 바뀌고 다시 새봄이 왔다.
꽃이 피고 따스한 봄볕이 창가로 날아드는 봄인데
그 훈기가 방안에 채워지지 않는다.

이때 나는 초가집을 바라본다.
거기서 비로소 침묵으로 불어오는 딸의 훈기를 느낀다.
세월이 간만큼 넓어진 공간으로 차 오르는 침묵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그 맨 상단에 팽배된 허와 정의 원점으로 닿는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딸의 마음공간 안에 색인된 초가집은
바로 외갓집 얘기였다고.
그것은 극히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초가집은 무언으로 말한다.
그 애가 어릴 적에 나는 누누이 말했었다.

엄마의 외갓집 뒷담 밑으로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끝없이 흘러갔노라고.
시냇물이 흘러가며 땅속 깊이 물줄기가 스며들 듯이
한국의 역사가 세월의 흐름을 쫒아 대대손손 연년이 이어왔다.

혈육의 맥을 지나 전통에 삶의 얼이 배어난 우리들의 한
민족적 한이라고 말해 주곤 하였다.
그 젖을 물리고 눈물짓던 어미의 슬픔을 딸은
수정빛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영상으로 기억했을까.

이 집은 모양새가 나의 외갓집을 닮았다.
충남 성급뜰 마을에 내린 서릿발 한과 끝없이 흐르는 냇물처럼
비통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또 화산 같은 오열의 불꽃이 솟아
바위로 굳어버린 침묵의 집으로 남았는가.

내 귀에 들려오는 바람의 탄식소리 하얗게 쓰러진
외할머니의 넋이 파도치며 들려온다.
그렇게 수십년 세월은 흘렀어도 그때 그 모습으로 살아있는 집
전설의 고향,비화에 묻힌 무언이 되어 벙어리 가슴앓이 집이 된 것일까.
돌이켜보면 일제 침략 이전의 외갓집은 지상낙원이었다.

나즈막한 싸릿문 바깥마당가 울창했던 살구나무의 운치
해마다 살구가 노랗게 익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살구나무 밑으로 모여 살구 잔치를 벌렸다.
사랑채 서당 방에서는 온종일 글 읽으시는
외할아버지 음성이 청아하게 들렸었다.

그 즈음 넓은 앞마당에 정좌해 앉은 초가집이 바로 안채인데
매년 가을갈이 새 볏짚 매끈하게 입힌 초가지붕이 산뜻해
마치 부잣집 안주인의 품위를 곁들였다.
안 대문 우측 담장을 따라 앵두, 모과, 대추나무 등이 철 따라
제 몫의 과일을 쏟아 가족들에게 풍요의 기쁨을 선사했다.

과실밭 맞은편에는 곡간, 방앗간, 마굿간에
일꾼들이 곡식 나르기에 분주했다.
부엌에서 뒤뜰로 돌아가면 반드레 윤기 흐르는 장독대가 있고
그 주변을 맴돌며 핀 맨드라미 봉선화, 채송화 꽃들이 아름다웠다.

장독대 뒤로 난 후문을 열면 거기 은빛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옹달샘 약수처가 절경이었다.
한학자이신 외할아버지는
오복중 하나인 자식복도 얻었었다.슬하에 3남4녀를 두고 계셨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해질 무렵이었다.
뜻밖에 퍼진 전염병으로 큰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었고
일본 유학 중이던 외삼촌은 학도병 영장을 받고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게다가 아직 출가하지 않은 막내이모에게 정신대의 위기가 닥쳐왔다.

하여 궁여지책으로 선도 보지 않고 열 여섯에 이모를
불행한 결혼으로 내몰게 되었다.또한 갑자기 독자가 된 외삼촌이
대학졸업을 며칠 앞두고 학도병으로 가게 되었으니
삼대독자마저 잃으면 대가 끊길 처지가 아닌가.

생각다 못해 가족들은 외삼촌을 깊은 산 속에 피신을 시켰다.
그리고 아들대신 외할아버지가 붙잡혀 갔다.
이런 속에서 혼자 남은 외할머니는 피를 토하듯이 통곡만 하시다가
가슴앓이(협심증)란 병을 얻었다.

해방되던 해 8월초였다.하필 그때 외할머니의 생신날이 되자
딸, 사위들이 모였다.집안이 망하는데 생일이 뭐냐고 반대하시는 할머니를
거역해가며 자식들은 생신상 준비를 했다.
이 때 큰 일이 났다. 외삼촌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사색이 된 할머니가 당장 되돌아가라고 떠밀었지만 막무가내였다.

다음날 아침, 생신상을 놓고 할아버지 생각에 온 식구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헌데 그때였다.들이닥친 일본 경찰에게 잡힌 외삼촌이 포승줄로 묶인 채
마을길로 끌려나갔다.이 충격에 쓰러진 외할머니는 마당에서 별세하시고
외삼촌은 투옥이 되었다.드디어 8.15해방으로 외삼촌이 출옥되셨지만
집안은 이미 피바다로 물들었다.

텅 빈 초가집에는 언어를 잃어버린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고문에 지친 외삼촌 역시 멍텅구리 초가집을 닮아버렸다.
성급뜰의 재원이던 그 기량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고향을 떠나 초야에 묻히신 외삼촌의 일생.

요즈음 들어 나는 자주 기차를 탄다.달리는 차창 밖으로나마
바라볼 꿈길 같은 고향마을을 그리면서,하지만 앙상한 산밑의 알록달록한
기와집 뿐,거기 우리의 고향은 없다.

잃어버린 고향에는 오솔길 따라 울창한 산새소리 시냇물 소리
초가집 뜰에 모여 앉은 식구들의 웃음소리 간데 없고
주렁박도 보이지 않는다.다만 나는 딸이 제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오면 침묵으로 말하는 이 초가집 이야기나 두고두고 해주어야 하겠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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