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새 - 이해인님

시詩IN 2014. 5. 23. 21:05

바다새 - 이해인님



바다새

 

이 땅의 어느 곳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어

바다로 온 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까지 온 거야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 거야


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이 작은 가슴의 불길


물 위에 앉아

조용히 식히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미역처럼 싱싱한 슬픔

파도에 씻으며 살고 싶어

바다로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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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고백 - 이해인님



황홀한 고백

 

사랑한다는 말은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같은 것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자락 바람에도 문득 흔들리는 나뭇가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 하늘이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 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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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는 - 이해인님



아무래도 나는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을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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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순간들 - 이해인님



아름다운 순간들

 

마주한 친구의 얼굴 사이로,

빛나는 노을 사이로, 해 뜨는 아침 사이로..

바람은 우리들 세계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메꾸며

빈자리에서 빈자리로 날아다닌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잡아흔들며, 때로는 텅빈 운동장을 돌며,

바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이 아름다운 바람을 볼 수 있으려면

오히려 눈을 감아야 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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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멀미 - 이해인님

시詩IN 2014. 5. 23. 17:01

꽃멀미 - 이해인님



꽃 멀 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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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산에도 핀다 - 노태웅님

 


늪과 함께 끈끈한 인연

고해(苦海)의 세계를 벗어나

구름을 타고 넘던 달빛이 어둠을 밀치면 

새벽 찬이슬만 받아먹던 

연꽃은 맑은 미소로 피어난다


늪에도 길에도 산에도 핀다

수줍은 붉은 볼을 비추며

감추어진 세상을 밝혀준다



구멍 뚫린 뿌리로 번뇌를 감싸며

가장 낮은 곳에서 

삼독(三毒)에 물들지 않게

인간의 욕망을 잠재우고 

청순한 사랑 같이 등불로 핀다


밝은 낮에는 연못에서

향기 날리며 더러움 씻어주고 

어두운 밤에는 산사에서

길 몰라 헤매는 중생의 길을 밝힌다


연꽃은 산에도 핀다

석등으로 피고 연등으로 핀다

하늘이 내린 불꽃으로

어두운 무명(無明) 세상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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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토플라즘 - 서동균님


가끔은 깨끗이 면도한 고흐가 되어

일그러진 지점의 끝을 흔들어 보듯

서 있는 자리가 명쾌하게 고정될 때가 있다


엑토플라즘이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다른 방문을 두드릴 때

깜짝 놀란 화병의 꽃처럼 푸드득

화폭에 바람이 분다


선과 면을 떠난 고흐를 만난다는 것은 

관람선의 위치가 뒤바뀌거나

나와 너가 뒤바뀌는 것이다


유리보호판에 비춰지는 반사체는

어떤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0.5그람의 무게로 이동한 흔적이 

관람객에 밀려 평면거울에 비친 사물처럼 투영된다


등식을 풀어내지 못한 별이 빛나는 밤은

팽팽한 비닐랩을 관통한 날카로운 송곳이다

그 곳에 또 다른 눈이 있다, 도플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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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나리 개나리 - 임영준님


노란 날개에 매달리다 보면
내내 움츠렸던 마음이 활짝 펼쳐질 겁니다
만나고 싶을 땐 언제 어디서나
함박웃음으로 다가와 따스하게 반겨줄 겁니다

무심코 쳐다보았다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종알거리던
어릴 적 풋풋했던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흘려보냈던 날들이 새삼 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한 아름 꺾어 들면 그토록 엉켜있던 실타래들이
쉬 풀어질 것도 같아 자꾸 눈에 담게 됩니다
이맘때만 되면 두근거리는 풋풋한 희망들이
손닿는 곳 어디에나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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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형태 - 서동균님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조등을 보면
숨겨둔 마음을 들킨 것 같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엔 조등이 없어
거울에 비친 그 모습으로 문상을 간다

검은 구두, 검은 넥타이, 일렬로 선 조문객이
빈 두레박 같은 말을 내보인다
천신, 지신, 조상께 고하는 향이
늦반디처럼 몸을 사르다 바닥에 뼈를 묻는다

숨겨둔 물은 달이 될 때가 있다
캄캄한 내면에 그림자를 보여주다가
그림자를 밖으로 끄집어내기도 하고
정한수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있는
그냥 달이 되기도 한다
가끔 바람이 찾아와
젖은 달을 가져가기도 한다

전자서명을 하는 녹명부錄名簿에
사설조의 곡소리 대신 침묵이 선명하다
봉투에 오돌도돌 인쇄된 부의賻儀 글자처럼
뼈가 드러난 말이 뒤엉킨 구두소리에

순간 어수선해지고 한 무리의 조문객이 왁자지껄 멀어진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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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 소리 - 정영숙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주앉아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

또닥또닥 또드닥 또드닥

마음을 맞추는 소리 일세

마음과 마음의 장단이 잘 맞는 다듬이

살은 고운비단 만들고


마음과 마음의 장단이 안 맞는 다듬이

살은 미운비단 만드네

만드세 만드세 마음의 장단 맞추어

고운비단 만드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주앉아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

또닥또닥 또드닥 또드닥

정을 두드린 소리 일세


다듬이 방망이 위로 오르면

막혔던 마음 풀려나는 소리고

다듬이 방망이 아래로 내리면

가정의 화목 두드리는 소릴세


만드세 만드세 사랑과 정을 다듬는

고운비단 만드세...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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