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장원에서 - 노현희님




미장원으로 가는 길은 항상 마음이 설레인다. 달라진 머리모양을 상상하고, 내 이미지와 맞을 것인가를 염려하고, 미용사가 그런 내 마음을 헤아려 줄 것인가 등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꼬리는 미용실 문을 밀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된다.


차례를 기다리며 잡지를 뒤적인는 내게 한 잔의 커피가 건네진다. 퍼머약 냄새 사이로 간간히 풍겨나는 커피향에 젖어드는 나를 알아챘나보다. 미용사의 그런 센스가 머리를 맡기려는 내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준다. 잡지에는 멋스럽고 우아한 머리 모양새가 많이 나와 있다. 비비안 리 머리든, 햅번 머리든, 황진이 머리든 내게 어울리는 모양새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커피는당신과 마시는 커피입니다'라는 광고를 본다.


당신과 마시는 커피, 그것은 언제나 추억을 만든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한 한 모금의 그윽한 커피, 그리고 바람부는 거리에서 이별의 쓰라림을 삼키는 자판기 커피, 이웃과의 수다속에 찰랑거리는 커피,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은은한 내음을 음미하며 남편과 마시는 느긋한 커피, 그리고 마음을 가라 앉히는 나 혼자만의 커피. 커피는 그렇게 사람과 사연을 달고 다닌다. 오늘, 미장원에서의 커피는 호감가는 세일즈맨이다.


깔끔하고 발랄한 머리모양을 좋아하는 면이었는데 요즘엔 우아한 분위기에 더 마음이 끌린다. 그게 나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쑥스럽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모양새부터 품위를 갖추고 싶은 건 어쩐 일일까. 긴 치마도 입어보고 헐렁한 남방 대신 블라우스로 멋을 내보기도 한다. 경쾌하고 젊은 디자인이 내게 겉돌고 있음을 느끼고부터 나는 블라우스를 찾게 된 것일까. 흰 머리카락이 늘어가는 남편을 보면서도 애써 젊은 티를 내려는 내가 민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는 순리대로 살기를 고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중후함보다 순수해보이는 생머리 모양을 미용사에게 부탁하고 만다. 아직은 남편에게 딸들과 함께 가시내같은 모습이고 싶다.


미장원 바닥에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다. 방금까지 내 신체의 일부였는데 쓰레기가 되어 쓸려가는 모습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생명도 그런 것일까.


창 밖으로 부는 바람이 황량한 것은 쌀쌀해진 날씨 탓만은 아니리라. 내 아들은 머리를 자르고 온 날, 눈물을 찍으며 나를 원망했다. 기르기까지 그애들이 머리카락에 쏟은 애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나는 단정함을 내세워 아이들을 미장원으로 내몰았다. 눈물까지 보이며 아쉬워하는 것은 긴 머리가 곧 멋이라는 그들의 편견 때문만은 아니었나보다. 자신의 일부를 떼낸 안타까운 미련이 컸던 모양이다.


예전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라 하여 소중히 다루었다지만, 요즘에는 삭발로써 제 의지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 삭발한 그들의 모습은 비장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삭발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삭발한 강수연의 모습이 그랬고, 학창 시절에 내가 따랐던 스님의 모습도 그랬다.


서클 지도법사였던 스님은 우리와 어울려 곧잘 탁구를 쳤고, 음악을 사랑하고 난을 즐겨 기르셨다. 스님은 떠나면서 기르던 난을 내게 주셨다. 은은하게 배어오는 난의 향기는 스님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스님은 느닷없이 교정에 나타나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잔디를 뽑아 물방울을 따먹기 게임을 하기도 했다. 직은 물방울을 따오기 위해 서로 얼굴을 가까이 했을 때에 느꼈던 숨막힘을 생각하면 아직 얼굴이 붉어진다. 파란 하늘과 더불어 넓은 잔디밭에서 승복에 싸인 사람은 이미 내겐 스님이 아니었는지 모른다.남자 법우들은 스님의 취미가 승같지 않다며 은근히 공격을 했고


절에 오래 남을 것 같지 않다며 여자 법우들에게 경계심을 유도했다. 어느 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는 인사 끝에 산 속엔 밤이 참 빨리 오는 것 같다고 했다. 곁에 있던 남자 법우는 산을 내려오면서 내게, 그 말은 색깔이 있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엔 정말 스님의 머리카락이 길어진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남자 법우들조차 스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스님과 어느 정도 정이 들 무렵 스님은 떠났고, 나는 한동안 가슴앓이를 해야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법당에 앉아 타오르는 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이끌림으로 뒤돌아보니 한 무리의 수국 속에 머리를 숙여 얼굴을 묻고 있는 스님이 보였다.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꽃 속에 잠긴 삭발의 머리는 너무나도 생경스러웠다. 모두들 좌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밖으로 달려나가 스님을 짧게 불렀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스님의 모습은 그대로 내게 각인되어 그 후 그리움이 되고 우수가 되었다.나는 그 어떤 샴푸로도 대신할 수 없는 향기를 삭발의 머리에서 느꼈다.


지금도 수국의 무리를 보면 빗방울이 맺혀 있는 것만 같다. 수국은 환한 웃음 뒤로 애조를 띠고 있었고, 무리를 이루어 꽃을 피웠으나 향기는 은은했다. 그건 우리 앞에서 당당히 부처님의 설법을 전하는 스님의 외로운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또한 그런 어우러진 향기가 우리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 내게 수국은 그렇게 승복의 빛깔을 느끼게 한다.그날 우리 몇몇은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 앉았고


스님은 비가 내리는 바다에 눈길을 주기도 하며 간간히 웃으셨다. 그러나 나는 법우들의 이야기를 챙겨들을 수 없을 정도로 허둥대고 있었다. 그리고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보며 스님의 옷에서 김이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보이는 게 모두 스님의 형체로 느껴졌다.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며 스님은 난이 잘 크는가 물으셨다. 나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난은 내 책상 위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가끔 삭발한 내 모습을 상상할 때가 있다. 그리고 스님처럼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비구니일 수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런 내가 우스워 슬쩍 부처님을 올려다보면 그분도 웃고 계셨다. 승을 승으로 보지 못하는 나의 미성숙조차 그분 앞에서는 응석이 되어 버린다. 마음대로 어린애가 되어도 좋았고 어른이 되어도 괜찮았다. 나는 그분의 어리석은 중생이므로... 그러나 지금, 너무나 먼 시간 속을 지나온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며 상념의 꼬리를 붙잡고 있었던 지난 밤에는 비가 많이도 내렸다.


오랜 시간동안 공들인 미용사의 솜씨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에 드러난 내 모습은 마음에 그다지 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상상과는 빗나간 낯선 내 모습이다. 그 섭섭함을 감추기 힘들어 수고하라며 나오는 내 걸음은 급하다. 혹 나는 풋풋한 스무살 시절의 내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하여 커피향과 음악을 찾아 거리를 헤매던 그 시절의 낭만과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을까. 나는 안다. 낯선 내 모습이 마치 미용사의 잘못이기라도 하듯 다음엔 다른 미용실을 또 찾아갈 것임을. 그것이 부질없는 기대라 할지라도 내겐 때때로 삶의 활력소가 되고 환기구가 되기도 한다.


스트레이트 퍼머를 하느라 머리카락을 미용기구에 붙여 커다란 원모양의 머리를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처럼 도도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미완성인 그 모습이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완성을 향해 다가가는 미완의 행위들, 그것에서 삶의 아름다움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혀 끝에 맴도는 커피향의 여운처럼 삶의 향기도 그런 여운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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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의 사계(四季) - 지희선님

                                  
초여름 날
 
만 사년 이십일을 이쁜 짓 다 하더니
비 오던 초 여름날 내 손 놓고 떠났고나
실실이 초 여름비 내리면 다시 괴는 눈물비 

아가가 갔다. 오랜 가뭄 끝에 첫 장마비가 시작되던 초여름 날이었다. 만 4년 20일. 앞당겨서 차려준 네 살 생일 케이크를 받고도 그 애는 먹지 못했다. 초대 되어 온 태권도 친구 몇 명만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케이크를 입에 넣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기합소리 우렁차게 외치던 친구가 왜 먼 길을 떠나야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른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에서만 보던 백혈병 주인공이 야생화처럼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창밖에는 플라타너스가 넓은 잎으로 굵은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었다. 후드득후드득. 아이에게 그늘을 주고, 아이가 ‘먼 길을 갈 제 호올로 외로울 제’ 동행해 주었을 플라타너스. 지금도 나는 비 오는 날이면 유월의 플라타너스를 기린다. 내 기억 속에 가두어 둔 네 살배기 그 녀석을 기린다.


가을 날
 
단풍은 단풍대로 은행은 은행대로
제각금 속울음을 토해내는 가을날
하늘엔 솔개 한 마리 속울음도 잊었다 

가을이다. 푸르렀던 기억은 추억으로 쟁여두고 제가끔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떠날 때는 가장 멋진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길 떠날 채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태권도 도복을 제일 좋아했다. 관에 태권도 도복을 넣어주고 못을 박으며 사범은 꺽 꺽 울었다.

떠날 때 나무는 잎을 버리고 나는 말을 버렸다. 눈물도 버렸다. “잘 가, 안녕!” 마지막 인사도 입술로만 달싹거렸다. 무심한 솔개 한 마리 맴을 돌며 하늘에 커다란 원만 그리고 있었다. 라이프 이즈 서클. 나는 윤회설을 믿고 싶었다. 그동안 가을이 참 많이도 다녀갔다.


겨울 날
 
함박눈 흰 나비 떼 온 천지에 휘날리면
깊은 산사 솔가지 쩌엉 쩡 부러지고
깃털 그 가벼움마저 천근 무게로 내리앉는 밤

그 애가 떠나고 첫 겨울이 왔다. 산사를 찾았다. 함박눈이 흰 나비 떼 되어 천지에 휘날렸다. 코트 깃에 내린 눈송이는 이내 녹아버렸다. 잠시 내 곁에 왔다 떠난 아이처럼. 바람이 불고 날리는 눈발 위로 햇빛이 얹혔다. 무지개빛이었다. 아름다웠다. 산사를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으리.

무지개빛 눈발을 받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찰나의 아름다움은 이내 사라지고 산사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산사의 밤은 적막했다. 깊은 밤이 되자 굉음이 잠자는 산을 깨웠다. 쩌엉쩡.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깃털처럼 가벼운 눈송이도 쌓이면 천근 무게로 내려앉는가. 잠시 흰 눈발과 내 슬픔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봄 날
 
봄빛도 눈 부셔라 반 쯤 눈 뜬 민들레꽃
길 가던 하얀 나비 날갤 접고 앉고나
아가야, 네 영혼은 어디에 날갤 접고 앉았나. 

봄은 어김없이 왔다. 찬바람에 온기가 드니 천지가 색채의 향연이다. 야산은 연초록 풀과 노란 유채꽃으로 수채화 한 폭을 그렸고, 우리 집 잔디밭은 노란 민들레랑 보색대비를 이루며 유화 한 폭을 선사한다. 잡초나 뽑을까 하고 채소밭에 내려섰다. 그때, 어디선가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무꽃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그 순간, ‘헉’ 하고 숨이 멎었다.

날개 위에 영혼을 얹고 있어 늘 하느작하느작 난다는 전설의 하얀 나비. 마치 내 아이가 다시 살아온 듯했다. 아이가 간 다음 날 아침, 채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는데 아이 숙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간밤에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 나는 섬뜩해서 물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아침에 빨래터를 향하는데 흰나비 한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따라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잘 따르던 숙모였다. 그 이후로 나는 늘 ‘흰나비 환상’에 젖어 살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흰나비가 내 주변을 맴돌면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곤 한다. 사람들은 계절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눈다. 하지만, 이 ‘어미의 사계’는 초여름으로 시작되어 봄날로 끝난다.

아니, 끝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계속 순환한다. 라이프 이즈 서클. 계절도 서클이고 사랑도 서클이다.시작도 끝도 없는 서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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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이 질때 - 허세욱님


소쩍새가 피를 쏟듯 구슬프게만 울던 늦은 봄 초저녁으로 기억된다. 산과 산이 서로 으스스하게 허리를 부비고 그들끼리 긴 가랭이를 꼬고 누운 두메인지라 해만 지면 금시 어두워졌고 솔바람이 몰고 오는 연한 한기로 미닫이를 닫아야 했다.40리 밖 읍내에 가셨다가 돌아오시지 않은 아버님을 마중하러 나는 세 살 아래 동생을 데리고 재를 넘었다.한참 걷다 보니 속눈썹 같던 초승달이 지고 어디를 보나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데 열대여섯 살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무서움에 질려 있었다.


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주먹만한 차돌을 주웠다.그리고 그것을 땀이 나도록 쥐고 동생더러 뒤를 따라오라 했다.여느 때같이 쇠죽 냄새가 물씬한 머슴의 등짝을 앞세우고 그 뒤를 바짝 따르며 아버님을 마중했던 밤은 그래도 든든하고 재미있었지만 그 밤처럼 풋나물 같은 두 형제만이 마중할 땐 떨리기만 했었다. 역력히 기억되는 것은 나보다 어린 동생이 훨씬 태연하고 의젓했던 것이었다.


겁을 먹다 보면 배도 고팠다. 자꾸만 커다랗게 들려 오는 부엉이 소리, 아버님의 호리한 체구에 표표한 흰 두루마기가 좀처럼 보이지 않을 때, 우린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그 무렵 우리 집 앞을 지나는 신작로엔 하루를 두고도 겨우 산판에 드나드는 트럭 몇 대와 누룽지처럼 쇠똥으로 얼룩진 황소의 달구지들만 삐걱거릴 뿐이었다.


20리 밖엔 기차가 통했지만 겨우 서너 번, 그것도 시커먼 화차로 아득히 연결된 임시 열차까지 셈에 넣어서 그랬던 것이다.원래 소박하셨던 아버님은 읍내 출입이 있을 때마다 40리나 되는 먼 길을 아예 걷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새벽 일찍이 길을 뜨셨다가 으레껏 황혼이 지나서야 오셨다. 심한 경우는 백리가 넘는 전주 나들이도 보행을 마다하시지 않았다.그래서인지 내가 겨우 열 살을 지난 뒤부터 시작한 마중이 제법 익숙해졌다. 외지에 나와 중학을 다닐 때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올 때면 나는 이 마중 같은 일로 학자(學資)를 토색질하던 불계수(不計數)의 빚을 갚으려고 했었다.


확실히 그런 예우가 있고 나면 책값을 주실 때 관대하셨다. 그리고 우람스런 머슴을 앞세우고 깜박이는 초롱불로 길을 밝히면서도 도깨비 얘기나 들으면서 오싹오싹한 밤길을 걷는 데 짜릿한 재미도 약간 느끼곤 했었다.



그 밤도 그러한 몇 가지 속셈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럴수록 목적을 위해선 아버님을 꼭 마중해야 된다는 다짐을 굳혔었다. 이윽고 멀리 펄럭이는 하얀 두루마기를 보곤, 평소 응석 한 번 부려 보지 못하고 자란 주제에 큰 소리로 "아버지"를 외쳤다. 그리고 우리 형제는 장신의 아버지 뒤를 따라 졸랑졸랑 돌아왔다.


여느 아빠처럼 두 팔에 형제를 거느리고 사탕이라도 한 개 속주머니에서 꺼내 주셨으면 했지만, 그렇게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지금은 더욱 그립다.도연명(陶淵明)이가 낙향할 때 문간에서 마중했던 그의 치자(稚子)보다 우린 더욱 어리석어서 먼길을 두근거렸는지 모른다.우리들 자식이 원행(遠行)의 아버님을 마중하던 곳은 먼 고개를 넘어 돌들이 산을 이룬 성황 고개요, 비단물이 반짝이는 청강수(淸江水) 징검다리요, 숨이 깔딱이는 높은 비석재였다.


요즘처럼 편리하게시리 문전에서 영송하는 것은 사무적이어서 싫다.통금 5분 전에 귀가하는 탕부(蕩父)나 낭아(浪兒)가 아닌데도 벨소릴 듣고서야 슬리퍼를 끌며 발발이와 함께 문을 열어 주는 그런 것은 더욱 싫다.지금은 분초를 다투는 약속에 서로 묶여 줄달음하는 정밀 기계 시대다. 옛날 우리 부조(父祖)들이 사랑하는 친구들과 재회를 약속할 땐 꽃이나 피거든 만나세. 아니면 풍엽(楓葉)이 만산(滿山)할 제 만나세. 등등 정말 아리숭한 그런 거였다.거기에 비하면 아버님 귀가 시간은 훨씬 구체적이었고, 기계 시대에 비하면 훨씬 애매했다.


시린 손을 부비며 고갯마루 고추바람 속에 서서 언제쯤 거나한 취기를 데불고 홀연히 시계(視界)에 나타나실 아버님을 마중함엔 기다리는 기쁨이 있다.살벌한 오늘의 서울에서도 때로 예고 없이 소낙비가 내리는 초저녁 주택가 입구를 스치면, 많은 아주머니나 어린 자녀들이 우산을 들고 누구를 기다리는 풍경을 본다.


지금쯤 어느 대폿집에서 술타령하는 남편이나 아빠를 기다리는 뜨겁고 목마른 풍경을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초승달이 지고 까맣게 어두운 고개에서, 지금은 다시 뵈올 수 없는 아버지의 하얀 두루마기를 기다리느라 우리 형제가 등을 맞대고 추위를 견디었던 무섭도록 적막한 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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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 버린 동화 - 박문하님

Thatched House (초가집)

가을비가 스산히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나는 비 속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어느 골목길 한 모퉁이
조그마한 빈 집터 앞에서 화석처럼 혼자 서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곳에는 오막살이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던 곳이다.
와보지 못한 그 새, 초가는 헐리어져 없어지고, 그 빈 집터 위에는 이제
새로 집을 세우려고 콘크리트의 기초 공사가 되어져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 앞에 묵연히 선 듯, 내 마음과 발걸음은 차마
이 빈 집터 앞에서떨어지지가 않았다.
웅장미를 자랑하는 로마 시대의
고적도 아니요, 겨레의 피가 통하는 백제,
고구려나 서라벌의 유적도 아닌
보잘 것 없는 한 칸 초옥이 헐리운 빈 터전이 
이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울리어 주는 것은 비단 비 내리는,
가을밤의 감상만은 아닌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에 나는 몹시 마음이 외로울 때나, 술을 마신 밤이면
혼자서 곧잘 이 곳을 찾아 왔었던 것이다. 밖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통금 시간이 임박해서도 이 초가 앞을 한 번 스쳐가지 않으면,잠이 잘 오지 않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직 이 초가집 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이 초가집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의 일로서 
그 때 나는 국민학교 1학년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내 형제들은 3남 2녀가 되지만 모두가 그 때 중국 땅에 망명을 가서
생사를 모르던 때이다.


 홀어머니는 막내 아들인 나 혼자만을 데리고 남의 집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을 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님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두 달 동안을
병석에 앓아 눕게 되었다.
추운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자는
그야말로 기한에 주리고 떨게 되었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 딱한 꼴을 보다 못해서 나를 호떡 파는 곳에다가
취직을 시켜 주었다. 낮에는 주린 배를 움켜 잡고서 그래도 학교엘 나가고
밤에는 호떡 상자를 메고 다니면서 밤늦게까지 호떡을 팔면 겨우
그 날의 밥벌이는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호떡 상자를 어깨 위에 메고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좋은 호떡 사이소. 호떡' 하고 외치면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길가에 있던 조그마한 초가집 들창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거무스레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호떡 5전 어치만 주가."
중년 남자는 돈을 쥔 손을 쑥 내밀었다.어스름 램프불이 졸고 있는
좁은 방 안에는 나보다 나이 어린 두 오누이가 있었고,그 옆에는 어머님인 듯한
중년 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호떡 한 개 값은 
1전이고, 5전 어치를
한꺼번에 사면 덤으로 한 개씩 더 끼워서 주던 때였다.
 

 중년 남자는 호떡 여섯 개를 받아서는 오누이에게 각각 두 개씩을
나누어 주고는 나머지 두 개 중에서 한 개를 중년 부인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덜커덩 창문이 닫히고 말았다.
창문의 닫힌 방 안에서는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네 식구들이 
호떡 먹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릴 때 한 번도 이러한 가족적 분위기를 맛본 일이 없었다.
일찍이 유복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또 두 형제간의 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애정 실조증에 걸리어 홀어머님 밑에서 살인적인 가난과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자라난 나에게 이날 밤 초가집의 흐뭇한 가족적 분위기는
나에게 있어서 뼈게 사무치도록 부럽고도 
그리운 광경이었다.


 이 때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이 초가집 풍경이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의 상징으로서 판이 박혔고, 내 몸과 마음이 외로울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호박꽃 같은
램프불이 피어 있는 그 창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속에서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 씹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원이 되고 한이 되어, 내 형제들은 왜놈들 치하에서 모두가 가정을 버리고
놈들의 철창 속에서, 또는 이역 땅 망명의 길에서 숨져갔지마는 나 혼자만이
비겁하게도 어떻게 하여서라도 집을 지키면서 어머님을 뫼셔
알뜰한 가정을 한 번 가져보고 죽겠다고 오늘날까지 몸부림을 쳐왔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탁류로 흘러가버린 지금, 나는 초가집보다는
몇 배나 더 큰 '콘크리트' 집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가족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마는
어쩐지 아직까지도 그날 밤의 그 초가집 창가의 광경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근년에 사랑하는 큰 자식놈을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리고


이따금씩 아내마저 그 거리가 무척 멀어져 가는 밤이면 나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는 곧잘 이 초가집 창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면 호박꽃 같은 램프의 불이 피어 있는 초가집 창가에서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언제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떡을 씹는 소리가 그 방에서 잔잔히 들려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운 내 동화 속의 이 초가집도 헐려져
간데온데 없어졌고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 이 외로운 밤을
나는 혼자서 진정코 어디로 가야만 한단 말인가?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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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나 - 김영월님

Nearly full moon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달과 별로 하여금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 이후로 해와 달은 변함없이 하늘에서 뜨고 지고 영겁의 세월을 되풀이한 채
이제 나는 불혹의 나이를 넘기려 한다..

선친께서 어쩌면 기막히게 나의 이름을 강원도 영월(寧越)이 아닌
영월(永月)로 지어 주셨는지 모른다..아무튼 달 과 인연이 있는 이름때문인지
평생 달의 이미지를 못 벗어나고 해보다도 달을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특이한 이름 덕분에 지나온 세월 동안 무수한 놀림감 이 되어

"왜 내게 이런 이름을 지어 주셨나" 하고 부모님을 원망할 때도 많았지만
끝까지 개명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버텨 온걸 되레 감사히 여긴다..
은행에서 지점장이라는 나의 명함을 고객에게 건네면 대부분 첫 인사말이
"아이구, 이름이 참 좋으십니다..혹시 본명이 아니고 예명이신가요?"
하는 난처한 질문을 받곤한다..

한편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회식 자리에서 가끔 짓궂은 동료 녀석이
내 이름이 기생이름과 비슷하다 하여 이런 노래를 불러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 적도 더러 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띵- 호아 띵- 호아..
 

사춘기 시절에 해와 달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의 대명사처럼 느껴졌다..
해가 동녘 하늘에 떠오르면 수줍은 듯 서녘 하늘로 숨는 달인가 하면
반대로 달이 동녘 하늘에 미소를 지으면 해는 또 서산에 기울어 버리고......

이런 숨바꼭질 놀음이 계속되는 걸 보면 그들의 기구한 운명이
정말 안타깝게 느껴졌다.. 시집을 읽으며 잠 못 이루던 문학 소년으로서
나는 시골마당에 나와 밤하늘의 달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걸 좋아했다..

중천에 높이 솟은 보름달은 다정하게 나를 반겨주고 교교한 달빛아래
한없이 순결한 세계를 맛보았다..달빛을 받아 노오란 웃음을 가만히 터트리던
뒤란의 달맞이 꽃은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가..

이렇게 달과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춘궁기의 쪼그륵거리는 고픈 배도
잊을 수 있었다..쏟아지는 달빛 세례를 받으며 밤이 이슥하도록 나는
영랑과 소월 시인의 싯귀를 읊조렷다..부모님보다도 그 어떤 친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벗 밤하늘의 달은 감수성이 강한 나의 소년 시절을 사로잡았다..

외로운 병영 생활에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지금도 밤하늘의 달을 바라볼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한 여인이 있다.. 매월 빠짐없이 "샘터"라는 잡지와 고운 글을
함께 보내주던 그녀는 나를 "달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그믐과 보름사이를 오가는 달의 이미지와 나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이 비슷했는지 몰라도 나는 그녀의 달님인체 많은 사연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칠 무렵에 그녀와 연락을 끊고 지낸 지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파도치듯 흘러 가 버렸다..

어느 하늘 밑에 그녀는 중년의 아낙네로 참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느 가을 날, 책갈피에 끼워 내게 보낸 고운 단풍잎에 만년필 글씨로
그녀가 적어 놓은 글귀는 아직도 내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따라 추억은 물들지라도 그대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옛 것일러라"

요즘도 나는 늦은 퇴근길에 중천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달님으로 사랑해 주었던 한 여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과연 내 이름에 걸맞게 달님의 고운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 걸까..

언제 바라봐도 변함없는 하늘의 밝은 달을 마음속에 지니며
고이고이 살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다..
세상의 명예와 욕심, 그리고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마음에 때가 묻고
딱딱하게 굳어 가는 걸 느낀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월 시인의 싯귀를 읊조리며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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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말하는 집 - 한영자님

효창공원, 뜬금없이 서 있는 초가집.

내 방에 있는 작은 초가집은 늘 고요하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든 언어가 침잠해 있고 침묵이 너무 깊어 숨소리조차 녹아버린다.
이것은 몇 해전에 시집간 큰딸이 밤을 세워 만들었다.

지점토를 빚어 만든 초가집은 몸집이 큰 화장지 통 만하다.
찰흙에 조약돌을 이겨,울둑불둑 벽돌을 쌓아 짚을 엮어 덮은
반달형 초가지붕이 아담하다.
 
문득 코 끝에 맴도는 외갓집 뜰 흙내에 이끌리어
갈색 벽돌 중앙에 자리한 쌍미닫이문을 들여다본다.
이것은 정사각형 나무창살에 흰 창호지를 발라 달았다.
양 문고리를 자세히 보면 굵고 둥글다.

갈색 쇠고리 손잡이가 대롱거리는 채 문은 항상 배시시 열려져 있다.
더러 길손이 들면 문전 박대 않고 맞아들여 빈가라 끼니를 굶고있으면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정성껏 대접해 보냈던 옛시절의 인심이
그 문전에서 소롯이 배여 나온다.
초가집 분위기는 늘상 지붕위에 어우러진 둥근 박이다.
 
죽 뻗어난 박넝쿨의 정기와 탐스런 박 잎 사이마다
하얀 박꽃을 피우고 있다.
각양각색 모양의 박들이 여물어 자라며
수줍은 얼굴 내민 모습이 소박해서 좋다.
문득 우리 옛 조상의 진한 순결성을 느낀다.

마음자태 바탕에 백의의 정기를 맥으로 이어온 민족이 아닌가.
오천년 역사 한겨레 핏줄의 상징이듯이 박넝쿨의 무한한 심성이 그러하다.
내심은 진취적이나 지리적인 탓에 역사적으로 숱한 외침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는 타국을 침범하지 않았다.
이는 약함보다 강한 군자의 덕으로 심지를 다져 꿋꿋이 참아낸
인내의 소침이 아닌가.
 
동방예의지국 백의민족성이 아마 청순한 박꽃을 닮았음인가.
고요한 달빛아래 핀 박꽃을 바라보며 마음이 둥글고
여유롭던 선조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비록 생활은 지금보다 가난했어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과 믿음이 풍요로웠다.

갓 말린 큰박, 작은 박, 조롱박을 어루만지며 웃어른과 아랫사람의 도리며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부모님의 지혜와 자애
그 자연스런 삶의 질서가 새삼 아쉽다.
처음에 나는 딸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서울로 시집을 가며 왜 이 초가집을 만들어
친정집 부산에 두고 갔는지 속속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딸이 출가한 후, 그 사이 세월은 계속 흘렀다.
그 애 없는 공간에서 봄, 겨울이 가고 해가 바뀌고 다시 새봄이 왔다.
꽃이 피고 따스한 봄볕이 창가로 날아드는 봄인데
그 훈기가 방안에 채워지지 않는다.

이때 나는 초가집을 바라본다.
거기서 비로소 침묵으로 불어오는 딸의 훈기를 느낀다.
세월이 간만큼 넓어진 공간으로 차 오르는 침묵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그 맨 상단에 팽배된 허와 정의 원점으로 닿는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딸의 마음공간 안에 색인된 초가집은
바로 외갓집 얘기였다고.
그것은 극히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초가집은 무언으로 말한다.
그 애가 어릴 적에 나는 누누이 말했었다.

엄마의 외갓집 뒷담 밑으로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끝없이 흘러갔노라고.
시냇물이 흘러가며 땅속 깊이 물줄기가 스며들 듯이
한국의 역사가 세월의 흐름을 쫒아 대대손손 연년이 이어왔다.

혈육의 맥을 지나 전통에 삶의 얼이 배어난 우리들의 한
민족적 한이라고 말해 주곤 하였다.
그 젖을 물리고 눈물짓던 어미의 슬픔을 딸은
수정빛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영상으로 기억했을까.

이 집은 모양새가 나의 외갓집을 닮았다.
충남 성급뜰 마을에 내린 서릿발 한과 끝없이 흐르는 냇물처럼
비통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또 화산 같은 오열의 불꽃이 솟아
바위로 굳어버린 침묵의 집으로 남았는가.

내 귀에 들려오는 바람의 탄식소리 하얗게 쓰러진
외할머니의 넋이 파도치며 들려온다.
그렇게 수십년 세월은 흘렀어도 그때 그 모습으로 살아있는 집
전설의 고향,비화에 묻힌 무언이 되어 벙어리 가슴앓이 집이 된 것일까.
돌이켜보면 일제 침략 이전의 외갓집은 지상낙원이었다.

나즈막한 싸릿문 바깥마당가 울창했던 살구나무의 운치
해마다 살구가 노랗게 익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살구나무 밑으로 모여 살구 잔치를 벌렸다.
사랑채 서당 방에서는 온종일 글 읽으시는
외할아버지 음성이 청아하게 들렸었다.

그 즈음 넓은 앞마당에 정좌해 앉은 초가집이 바로 안채인데
매년 가을갈이 새 볏짚 매끈하게 입힌 초가지붕이 산뜻해
마치 부잣집 안주인의 품위를 곁들였다.
안 대문 우측 담장을 따라 앵두, 모과, 대추나무 등이 철 따라
제 몫의 과일을 쏟아 가족들에게 풍요의 기쁨을 선사했다.

과실밭 맞은편에는 곡간, 방앗간, 마굿간에
일꾼들이 곡식 나르기에 분주했다.
부엌에서 뒤뜰로 돌아가면 반드레 윤기 흐르는 장독대가 있고
그 주변을 맴돌며 핀 맨드라미 봉선화, 채송화 꽃들이 아름다웠다.

장독대 뒤로 난 후문을 열면 거기 은빛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옹달샘 약수처가 절경이었다.
한학자이신 외할아버지는
오복중 하나인 자식복도 얻었었다.슬하에 3남4녀를 두고 계셨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해질 무렵이었다.
뜻밖에 퍼진 전염병으로 큰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었고
일본 유학 중이던 외삼촌은 학도병 영장을 받고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었다.
게다가 아직 출가하지 않은 막내이모에게 정신대의 위기가 닥쳐왔다.

하여 궁여지책으로 선도 보지 않고 열 여섯에 이모를
불행한 결혼으로 내몰게 되었다.또한 갑자기 독자가 된 외삼촌이
대학졸업을 며칠 앞두고 학도병으로 가게 되었으니
삼대독자마저 잃으면 대가 끊길 처지가 아닌가.

생각다 못해 가족들은 외삼촌을 깊은 산 속에 피신을 시켰다.
그리고 아들대신 외할아버지가 붙잡혀 갔다.
이런 속에서 혼자 남은 외할머니는 피를 토하듯이 통곡만 하시다가
가슴앓이(협심증)란 병을 얻었다.

해방되던 해 8월초였다.하필 그때 외할머니의 생신날이 되자
딸, 사위들이 모였다.집안이 망하는데 생일이 뭐냐고 반대하시는 할머니를
거역해가며 자식들은 생신상 준비를 했다.
이 때 큰 일이 났다. 외삼촌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사색이 된 할머니가 당장 되돌아가라고 떠밀었지만 막무가내였다.

다음날 아침, 생신상을 놓고 할아버지 생각에 온 식구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헌데 그때였다.들이닥친 일본 경찰에게 잡힌 외삼촌이 포승줄로 묶인 채
마을길로 끌려나갔다.이 충격에 쓰러진 외할머니는 마당에서 별세하시고
외삼촌은 투옥이 되었다.드디어 8.15해방으로 외삼촌이 출옥되셨지만
집안은 이미 피바다로 물들었다.

텅 빈 초가집에는 언어를 잃어버린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고문에 지친 외삼촌 역시 멍텅구리 초가집을 닮아버렸다.
성급뜰의 재원이던 그 기량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고향을 떠나 초야에 묻히신 외삼촌의 일생.

요즈음 들어 나는 자주 기차를 탄다.달리는 차창 밖으로나마
바라볼 꿈길 같은 고향마을을 그리면서,하지만 앙상한 산밑의 알록달록한
기와집 뿐,거기 우리의 고향은 없다.

잃어버린 고향에는 오솔길 따라 울창한 산새소리 시냇물 소리
초가집 뜰에 모여 앉은 식구들의 웃음소리 간데 없고
주렁박도 보이지 않는다.다만 나는 딸이 제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오면 침묵으로 말하는 이 초가집 이야기나 두고두고 해주어야 하겠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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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힘 - 김인자님



가을의 끝에서 초겨울로 접어들 때쯤이면 집집마다 김장을 하게 된다.. 지난해는 유난히 배추와 무값이 비싼데다가 속이 차지 않아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서 김치를 덜 먹는다고 해도 때가 되면 해야 할 것이 김장이다..
 

해마다 내 김장 걱정까지 해주시는 친정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집이 넓으니 그 곳에 와서 김장을 해가라는 것이다.. 여든넷의 연세에도 건강하시어 일일이 딸네 집에 전화하시고, 이것저것 챙겨 주실 때만큼은 어머니의 힘을 과시하신다.. 그런 어머니 마음을 딸들은 헤아릴 길이 없다.. 어머니는 해마다 김장을 직접 해주시거나 배추로도 주셨는데, 직접 해주신 것도 꽤 여러 해나 된다..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친정에 가서 김장을 해오는 일이 복잡하고 부산스러운 생각을 하면 올케 언니에게 미안하지만, 나 살아서 해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이것도 효도일 수 있지 않느냐는 언니의 말에 집이 넓은 친정에 가서 김장을 해오기로 했다.. 몇 해 전 언니네 가 경기도 오남리에 조그만 땅을 사서 함께 농사를 지었다.. 고추와 고구마도 심고, 무 배추 씨앗도 넣어
정성스럽게 키웠더니 잘도 자랐다..
 

제때에 김매주고 솎아주고, 속이 차도록 배추를 묶어주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 배추를 뽑고 다듬어 언니네 집으로 실어와 김장을 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동차로 3,40분은 가야하는 그 곳에 일요일마다 가서 야채들을 보살펴주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 언니도 지난해부터는 농사짓는 일을 그만두자고 했다..
 

그것을 알고 계신 어머니는 딸들 생각에 배추를 많이 심으셨던 게다.. 해마다 어머니는 손수 농사를 지어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쁨으로 사시는 것 같다.. 배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야채나 잡곡을 주실 때마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그 중에서도 태양에 말린 고춧가루를 주실 땐 가슴이 뭉클해진다.. 언니네 밭에다 고추를 심고 가꾸어 고추를 따보니 허리가 몹시 아팠다.. 한 바가지씩 열린 고추가 바람에 쓰러질까봐 막대기로 받침대를 세워주고, 고추를 따도 말릴 공간이 적어 애쓰는 언니를 보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가위로 자르고 햇볕에 말려 방앗간에 가 빻아서 주시는 노력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데 서슴없이 그 일을 잘도 하시다.. 그것도 노쇠한 몸을 이끌고 일하시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만 한데,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식들은 생각도 못할 나눔의 가르침을 몸으로 알려 주시는 어머니, 자식들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 베푸시는 정성은 천성이신 것 같다.. 지난해도 배추 농사를 지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고, 밭이 없는 사람에겐 밭도 떼어 주셨다고 한다.. 집 앞에 있는 그 밭은 동네에서 제일 땅이 좋다고 오래 전부터 소문이 나 있다.. 씨앗만 넣으면 무엇이든지 잘 된다는 밭을 갖고 계신 것도 농사가 잘되는 비결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그 결정체가 아닐까. 수 십년 동안 농사를 지은 노하우도 있겠지만,오로지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주려는 마음이 무엇을 심던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농사를 지어내는 비결이 아닐까. 그래서 해마다 배추도 고소하고 무도 배속같이 물이 잘나고 맛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서울에 사는 언니와 나, 안산에 사는 동생 둘까지 딸 넷이 다 모였다.. 배추를 절이고 파와 갓을 다듬고 무채를 썰었다.. 모두가 오빠와 어머니의 손길로 길러진 채소들이다.. 어머니네 것과 네 딸들, 시집간 손녀딸 것까지 여섯집 김장을 하려니 배추가 김치공장같이 쌓였다.. 어머니네 식구라야 손녀딸 둘도 시집가고, 오빠 내외와 세 식구가 사니 김장은 조금만 해도 될텐데, 더구나 올케언니가 직장을 다니니 딸들 것보다도 더 적게 해도 될 일이었다..
 

막상 가서 배추를 절여놓고 보니 어머니를 너무 힘들게 해드리 것 같아 송구스러웠다.. 김치 담그는 일이야 딸들이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면 뒷설거지도 많고, 오빠나 언니가 오기 전에 빈집에 홀로 계실 어머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픈데, 몇 해 전 병원에 계실 때의 그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고...
날렵한 몸놀림에 신바람까지 나신 것 같다..
 

친척 아주머니 세분이 오셔서 도와 주셨지만 배추가 많아서 무채도 많고, 양념을 넣어 버무리는 일도 힘들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 간이 싱겁네 짜네, 양념을 더 넣어라 젓갈을 더 넣어라 , 웃음과 이야기가 한데 어울리고 버무려져서 집안이 시끌 벅적 했다.. 배춧잎 사이사이에 맛있게 버무린 소를 어머니 정성과 함께 넣고 나니 날이 추워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배추소로 쌈을 먹으니 고소한 맛에 이끌리어 자꾸만 먹게 된다.. 딸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보아도....
힘이 나는지 어머닌 연실 환하게 웃으셨다..
 

아직 정정하신 여든넷의 어머니는 시집 간 딸들이 모여 김장하는 모습만 보아도 흐믓하신가보다.. 연실 입에다 막내가 사온 떡이나 사탕을 넣어주신다.. 올케언니에게 어머니 자신도 미안하실 텐데 해마다 딸들 김장하는 것도 어머니의 힘이고 울타리가 아닌가. 몇 해를 더 이런일로 연로하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까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온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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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구두의 관계 / 안도현님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면 적어도 4, 5년은 신고 다닌다. 
나한테 한 번 걸린 구두는 참으로 고생이 많다. 
구두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처절하게 끌려 다녀야 한다. 
굽이 닳으면 수선 가게에 가서 갈아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자주 구두약을 발라 윤이 나게 닦아주는 것도 아니다.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라면 
죽자살자 신발로서 그저 묵묵히 고된 노역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구두한테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것은 
나의 검소한 생활 따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구두를 애지중지 아껴가면서 신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내 구두는 늘 꾀죄죄하고 우중충하고 우글쭈글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구두는 미리 몸을 망칠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하고 쉽게 친해질 수가 없다.

구두 가게의 진열대 위에 놓여 있을 때 
구두의 광은 왜 그렇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번쩍거리는가? 
길들지 않은 새 구두는 얼마나 어색하고 낯설고 불편한가? 

새 구두를 한 켤레 장만했다고 치자. 
나는 구두를 사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뻣뻣한 구두 뒤축을 발바닥으로 지근지근 눌러 밟는다. 
구두 주걱을 이용해서 억지로 끼어 신지 않아도 될 만큼 
새 구두의 성깔이 누그러질 때까지 말이다. 
그 다음에는 약을 묻혀 구두를 솔로 닦는다. 
광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번쩍거리는 광을 죽이기 위해서다. 
마치 오래 전부터 길 위를 걸어다닌 구두처럼 얼렁뚱땅 위장을 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

누구나 한 번쯤 구두를 사서 구두한테 당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새 구두가 버릇도 없이 새 주인의 발뒤꿈치를 함부로 물어뜯던 기억 말이다. 
그러면 물집이 생겨도 아픈 기색 없이 신고 다녀야 한다. 
물집이 터져 아문 뒤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새 구두를 신었을 때,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구두를 길들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가만히 따져보자. 사람이 구두를 길들이는 게 아니다. 
구두가 사람을, 사람의 발을 길들이는 것이다. 

발과 구두가 불편하게 지내다가 
그 어색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시기는 아주 모호하다. 
그것은 슬며시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슬며시 스며드는 것>, 
그것을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한 번은 음식점에 갔다가 구두를 바꿔 신은 적이 있었다. 
뒤엉킨 신발들 속에서 누군가 내 구두를 먼저 꿰어 신고 자리를 떠버린 것이었다. 
분명히 내 구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 '누군가'의 구두만이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억울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 못된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신발 하나 못 찾아 신는 놈, 어디 나타나기만 해 봐라, 하고 나는 마구 툴툴거렸다. 

하지만 점잖은 체면에 맨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낯선 구두를 신어 보았다. 
디자인과 크기는 내 구두와 엇비슷했지만, 
낯선 구두를 신었을 때의 어색함이 내 발을 휘감아왔다. 
내 발은 낯선 구두에게 스며드는 것을 꺼렸고, 
낯선 구두도 내 발보다는 이전 주인의 발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 불화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내내 그 '누군가'를 원망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내 머리 속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바로 내 발과 낯선 구두가 나도 모르게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아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리라. 
서로에게 슬며시 스며드는 것, 스며들어서는 그이의 숨결이 되는 것!

구두가 내 몸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몸의 밑바닥인 발바닥보다 더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몸이 구두이다. 
발가락 사이의 질척한 땀과 고약한 고린내를 껴안고 
구두는 내가 걸어 다니는 길은 어디라도 따라 간다. 
아니, 나하고 함께 간다. 동고동락이다. 
내가 기쁘면 구두가 먼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껑충 뛰어오르고, 
내가 아파 누우면 구두가 미리 알아채고 현관에서 숨죽인 채 나를 기다린다. 

내가 늙어 가는 만큼 구두도 늙어 간다. 
그래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 늙어 가는 내 구두를 나는 미워할 수 없다. 
구두를 신고 길을 걸을 때, 왜 그가 따각따각거리는 소리를 내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걸어갈 길이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마음놓고 발걸음을 떼도 된다고 구두가 친절하게 안내하는 소리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나는 또 내 구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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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보다는 생산자가 되기를..



우리는 모두 소비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또 생산하고 살아간다.

20세기는 어쩌면 모방하고 소비하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 어떤 하나를 만들어내면 수많은 아류가 쏟아져 나왔다.

뭔가가 히트가 되고 대박나면 어김없이 그것을 본딴 아류가 나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세월에서 창조를 가볍게 여기고 살아왔다.

스스로 만들기 보다는 모방하고 그것으로 재 창조를 구현하려고 하기 보다는

남의 창조를 소비하는데만 급급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예로서 오리온의 초코파이가 있다^^

그리고 초코파이는 전국민이 사랑하는 간식이 되어버렸다.

그후 아니나 다를까 빅파X니,몽X통통이니 아류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대박을 위해서 스스로 만들고 연구하고 창조하지 못한채

그저 소위 잘나가는 상품을 거의 똑같이 모방하기 일수였다.

연구는 그저 고리타분 한것이고.창조는 할일없는 자의 영역이라고 치부했다.



모든것은 상업화의 그 초점에만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허나 생각해보면 우리의 70년대,80년대 먹구살기에 급급했다.

한끼의 식사를 위해서 고상한 연구 따위는 필요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21세기가 다가왔다. 우리도 G20개최니 뭐니 하면서

선진국이라고 말만 그럴듯하게 떠벌리지만.

과학기술이나 연구수준에서는 아직도 너무나 미흡한 실정이다.

 

미국이나,유럽등에 글로벌 기업의 제품 기술을 모방해놓고서

심심하면 그들로 부터 소송을 당하는게 우리나라의 재벌기업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재계1위 기업에서 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사실 소셜네트워크는 우리나라가 처음 시작했다.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그것이다.서로 친구와 친구의 인맥과 또 그들의 친구와

거미줄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그시작을 우리나라 대한민국 기업에서 시작한거다.

그런데 싸이월드는 더이상 연구를 진척시키지 않았고 상업화의 길로 가버렸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미국이 페이스북과,트위터라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세계인터넷시장을 완벽히 지배하면서,우리의 싸이월드는 변방에 머물고 말았다.

시작은 우리가 했지만.연구를 지속하지 않은 댓가로

미국의 20대초반 대학생 두명이 싸이월드를 모델로 만들어낸 

SNS에 의해서 참패하게 된것이다.



우리는 이점에서 많은것을 느낀다.

우리의 기업문화는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것만을 중시한채

개발과,연구에 투자를 게을리 하는것이 만성화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우리나라에게 미래란 없다고 보여진다.



기술은 일본에 미치지 못하고,가격경쟁력은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면 우리는 기술력에 비중을 두어야 할것이다.

15년전만 해도 일본의 소니를 우리가 앞도하게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세계 전자제품 시장에서 우리가 일본을 이길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다.



기술력,연구투자 이것은 결국 창조에 있다.

남의 기술을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하다,창조한 결과물을 다른이들에게 제공하고

공유하는 능력 이것이 필요한 것이다.



창조란 때론 우리의 삶에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그중에 하나가 정치다.선거철만 되면 스피커로 상대후보를 헐뜯는게 예사다.

자신이 국민들의 민생을 위해서 어떤 정책과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그런것을 알리는것이 아니라.

상대후보의 약점을 떠벌려서 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자신이 당선되려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대는 21세기고, 유권자도 21세기의 사람인데 정치인만 20세기에 머물러있다.

정치인들 스스로가 창조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려는 그런 참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고민하지 않는자가, 창조의 고통을 모르는자가, 어떻게 좋은 정치를 할수가 있으며

어떻게 국민을 만족하는 지도자가 될것인가? 당선이란 거짓 등대불을 향해서 생각없이

달려가는 배는 결국 목적지와 멀어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된 목적지를 위해서 고민하는 선장. 그것이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인이다.

자신의 피와 땀을 기꺼히 여기며 만들어내려고 힘쓰고 노력하는 마음.

남을 따라하기 보다는 남의 길만 찾아 걸어가기 보다는 자기길을 만드는 사람

남의 지지자를 뺏으려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진정성과 대안으로 지지자를 만드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된 정치인이 아닐까 생각하며 소비보다는 생산하는 창조자인 것이다.

비단 사업가들,정치인들만의 덕목이 아니다.국민모두가 창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창조란 아프다고 한다, 창조란 힘들다고 한다,그러나 창조는 힘든것 이상의 보상을 준다

비단 물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그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이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강한 원동력이 되어 줄것이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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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앎은 무엇일까? 앎은 知이다 혹자는 앎은 책을 읽어 배우는 것을 앎이라 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앎이라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에 열중하되,그것을 유익히 해석치 못하며,책을 많이 읽되,참되게 익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우유를 내고, 뱀은 독을 내듯이.


앎을 해석하는 그자의 틀이 잘못된 것인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잘못된 틀을 만들게
된 계기라도 있는 것인지, 잘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자도 옳은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대로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그자는 말한다. 이기적이고,악하게 살아가며 사람답게 살겠노라고.
그러나 과연 그자는 사람답게 살고있을까? 그자의 기준에 사람다움은 무엇인가?
금수의 금수다움과 사람의 사람다움의 차이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
전자와 후자가 같은 뜻의 일갈인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추측만 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자의 말도 옳은지 모른다.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자신을 위해서만 살수는
없을것이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만의 가치로 스스로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을
자의적인 가치의 사람다움으로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자 하나만이라면 이 사회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터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그자와 같은자가 많을 것이다. 그리한 세상인지라 욕심 하나만
가지고도 볼수있는 한계가 어디인지 알수없을 정도로 타락해가고 있는 것이다.
욕심의 충돌, 이기심의 충돌, 그것은 하나같이 비극과,참혹한 결말을 남긴다.


먼저. 사람이 되라 말하고 싶다. 자신이 사람이어야만 사람을 만날수 있을것이다.
금수로서 사람을 만난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모두가 금수로 보일것이다.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의 가치를 알고 행하고 사람의 길을 걸을수가 있을것이다.
사람의 길을 다할때 그길은 하늘의 길과 맞닿아 있을것이고 그로서 우리는


비로서 진실한 앎을 깨닫지 않을까? 책으로서 아는것은 앎의 가지일 뿐이다.
우리가 앎의 뿌리를 알기위해서는 사유하며 성찰하며 마음으로 앎을 가져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를 탐구하는것, 무엇이 사람을 위한 것인가를 알아가는것,
무엇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인지 깨닫것,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를 아는것


이런것들을 깨닫는것이 앎이 아닐까? 잘못된 배움으로서 앎을 잃어 가는것
배움을 잘못 깨닫고 그 배움을 왜곡하며 독을 만드는 배움은 천년을 한듯 유익할까?
자신의 이로운데로 풀이하며 그것을 명분삼아, 악업을 쌓아가는 것은 앎이 아니다.


우리사회가 앎을 추구하며, 앎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기를 갈망한다.
지금은 더이상 타락할수 없을 만큼, 더이상 부패할수 없을만큼 세상이 썩어있다.
마치 인류 공멸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제는 모두 깨어 일어나야한다
나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고, 내 나라를 알고, 세계를 알아가길 바란다.


그 앎을 바탕으로 의문을 품고 의문의 답을 얻어가며 해결을 찾아갈수 있는.
우리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해결의 근본은 "사람"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Posted by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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